2004 베트남

기다림과 인내 속에 만난 하노이

이젠씨21 2014. 6. 5. 14:51

2004년 7월 20일 화요일

 

하노이 시각 밤 10시 15분(서울 시각 12시 15분). 일행이 탄 비행기가 노이바이 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 처음 계획대로 였다면 10시간 전에 도착했어야 할 일이었기에 조금은 불평을 털어 놓을 만도 할 터인데 오히려 우리 일행의 얼굴에는 '드디어 왔구나!' 하는 안도의 표정과 오랜 기다림과 야간비행으로 인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사그라지지 않은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하다.

 

 

이른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가며 공항으로 모였을 때까지만 해도, 아니 베트남 항공이 정비관계로 처음 예정보다 3시간 가량 이륙이 지연된다는 항공사 안내에 따라 남은 시간동안 공항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슬렁거릴 때까지만 해도, 처음 가는 베트남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차 피곤함 따위는 끼어들 틈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데 베트남 항공의 반복되는 이륙 지연과 이해할 수 없는 지연이유, 그리고 조금씩 거세지는 승객들의 불만토로... 기다림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우리 일행의 얼굴에서도 왜인지 모를 불안의 기색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매일매일 이주노동자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싸워가며 바쁘고 정신없는 인권상담소 생활을 몇년씩 해오면서 단련된 남다른 인내심으로 10시간이라는 오랜 기다림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했고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조금은 어두운 조명과 그 빛이 반사되어 연한 회색빛을 띠며 차분하게 단장된 통로를 따라 도열하듯 늘어선 짙은 카키색 제복에 붉은 견장을 찬 공항 공안원들 사이를 지나치면서 새삼 나는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느낀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후 '이제 정말 베트남에 왔구나!' 하는 감상을 느끼려는 순간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또 한번의 인내력 테스트... 먼저 도착한 짐꾸러미들이 분실되어 소재를 알 수 없게 된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저기 문의한 끝에 공항직원의 안내에 따라 찾아간 분실물 보관소. 제멋대로 쌓여있는 짐꾸러미들 속에서 각자 자기의 짐을 찾아 나오면서 일행들의 입에서 일련의 사건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 쏟아져 나온다. '시작부터 불길한데... 여행이 순탄치 않을 것 같아!' 만일 현지 가이드까지도 제시간에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 일행이 느끼기 시작한 설레임을 약간 넘어선 긴장감이 점점 불안감으로 바뀌면서 매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지 않았을까?

 

밤늦은 시간,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국의 공항. 평소 많은 베트남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문화에 대해 궁금해하며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찾아온 곳. 그러나 지금 이순간 나는 낯선 땅에 떨어진 그저 어설픈 이방인일 뿐이다. 나름 편안한 조건에서 가이드까지 둔 단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나온 것도 이럴진대, 아는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 혼자 떨어져 고된 노동을 하며 몇년씩 머물러야 할 이주노동자들이 타국의 공항에서 느꼈을 심정은 어땠을까? 군데군데서 담배를 피우며 우리를 쳐다보는 현지인들의 눈을 뒤로 하고 가이드를 따라 공항을 빠져나오는 이방인의 머리 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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