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베트남

얼굴들..

이젠씨21 2014. 6. 5. 16:11

2004년 7월 23일 금요일

 

바람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시간은 새벽 5시를 지나고 있었다. 베트남에 온 후 이상하리 만치 아침잠이 없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부족한 잠 때문에 피곤함을 견디지 못했을 텐데 4일째를 지나고 있음에도 별 이상이 없다. 일행들의 말대로 베트남이 체질에 맞는 걸까?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창가에 서서 내려다본 하롱베이는 마치 거대한 산맥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고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물살을 가르며 지나는 몇 척의 작은 배가 한데 어울려 한 폭의 거대한 동양화를 감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베트남에 온 후 줄곧 마치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 것처럼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보다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애를 썼는데 오늘만은 신비스런 동양화 속에 빠져 있는 그대로의 경치에 취해보고 싶어 졌다.

 

 

우리 일행을 태운 배는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수많은 섬들이 제각기 멋을 부리며 장관을 이루는 하롱베이의 섬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고 있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뱃길 양쪽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한껏 취해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척의 작은 어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양이 특이해서 사진기를 커내 연신 셔터를 누르는데 승무원 하나가 무어라 말을 걸어왔다.

 

베트남에 온 이후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인 그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는 한국에서는 어떻게 고기를 잡느냐고 묻고는 내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하롱베이에 대한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라는 말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자랑은 끊이지 않는다. 그나마 어설프게라도 할 줄 아는 외국어라고는 영어 밖에 없는 나로서는 의사소통이 되는 베트남인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기 때문에 그의 말에 대꾸를 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올해 28세라는 그는 이곳 하롱베이가 고향이라고 했고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어부로 살다가 지금은 육지로 나가서 살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런대로 고기가 많이 잡혀서 어부들의 생활도 괜찮았는데 언젠가부터 물고기도 줄어들고 생활여건도 도시에 비해 형편없이 어렵게 되면서 많은 어부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 도시로 나가고 지금은 도시로 갈 수 없었던 사람들만이 관광객을 상대로 고기를 팔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우리가 탄 배는 점심식사로 준비할 해물을 사기위해 한 땟목에 접근하고 있었다.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배들도 그 땟목에 배를 대고 해물을 흥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승무원과의 대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궂은 날씨 때문에 이었을까? 관광객들에게 해물을 파는 땟목위 어부 가족들의 얼굴이 수심에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혹시 좀 사는 나라에서 와서 돈쓸 곳을 찾는 그렇고 그런 관광객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였다. 동양화 같은 경치에 취해 그 그림속의 일부가 되어보고 싶었던 마음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땟목에서 산 해물로 한상 가득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함께 온 일행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만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롱베이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베트남의 보통 사람들이 부딪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찾은 하노이 구시가의 동수완 시장에서 마주친 노점상 어린아이의 얼굴에서도,

 

바쁜 일정의 여독을 풀 요량으로 찾은 마사지 샾에서 발마사지를 해준 여종업원들과 늦은 밤 호안키엠 호수 근처의 나이트 클럽 앞을 서성이던 젊은 여성들의 얼굴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인공해변을 만들어 놓고 별장을 지었다는 프랑스인들의 휴양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해산물을 팔기위해 유람선을 향해 손짓을 하면서.. 하롱베이 어부들이 지었을 표정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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