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베트남

쎄옴을 아시나요?

이젠씨21 2014. 6. 5. 16:45

2004년 7월 24일

 

베트남에 온 이후 처음으로 화창한 아침햇살을 보며 눈을 떴다. 지난 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리 속이, 짙은 구름이 걷히고 말끔하게 개인 하늘처럼 개운해지는 듯했다. 게다가 자유일정의 첫날이라는 기대감까지 더해져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동안의 공동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아쉬움으로 남겨두어야만 했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채워보리라고 마음먹고 길을 나섰다. 베트남에 온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열대의 찜통 같은 무더위를 즐기며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베트남 민족박물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베트남에는 50여개가 넘는 민족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민족이 VIET족을 비롯해 남북으로 긴 베트남 전역에 걸쳐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각각의 민족들은 생김새로 다르고 사용하는 고유 언어와 전통적인 풍습도 달랐다. 하나둘도 아닌 50여개의 민족이 하나의 베트남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국에서 만나던 베트남인들 중에 그 외모가 현격하게 달랐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제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같은 베트남 사람인데도 출신지역 등으로 나뉘어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의문이 조금 풀어졌다. 함께 간 일행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많은 종족이 그 나름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애를 쓰는 베트남 정부의 노력도 읽을 수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면서 무분별하게 만연되기 시작한 물질만능주의로 많은 지역에서 고유의 생활문화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 한국도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대부분의 지역사회에서 공동체가 붕괴되는 상황을 경험했고 지금까지도 그 부작용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기 그지없는데 이곳 베트남도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점심식사로 하노이 구시가 지역에 있는 닭고기 쌀국수(PHO GA)를 먹고 일행과 헤어져 본격적인 개인 자유일정에 들어갔다. 자유일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한국에서 올 때 이미 대략의 계획이 서 있었다. 한국에서 알게 된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으로 오기 전에 살았던 삶의 공간을 직접 찾아보면서 좀 더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보고 싶어던 것이다. 첫 자유일정은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베트남 친구인 투안(THUAN)의 소개로 하노이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쯔엉 후 탕(TRUNG HUU THANG)씨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쯔엉 후 탕(TRUNG HUU THANG)씨는 투안(THUAN)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다. 투안(THUAN)의 말에 의하면 머리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해서 하노이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와 지금은 베트남 정부의 홍보출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엘리트라고 한다. 탕(THANG)씨는 베트남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영어를 하는 친구까지 데리고 나오는 배려를 해주었다. 구웬 띠 안(NGUYEN THE ANH)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친구는 탕(THANG)과 함께 일하는 후배라고 했다. 그들과 한국에 있는 투안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인 것처럼 금방 가까워졌다.

 

 

어디를 가고 싶으냐는 물음에 한국에서 부탁받은 선물을 전해주어야 한다고 대답하자 그럼 어서 가자며 자신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를 끌고 나온다. 드디어 '쎄옴(XE OM)'을 타보는 구나! 베트남에 와서 가장 많이 보아온 것이 오토바이였다.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질주하는 광경에 그저 탄성만을 질렀었는데 드디어 직접 타고 베트남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탈것을 의미하는 쎄(XE)와 끌어 안는다는 의미의 옴(OM)을 합쳐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운전자를 끌어안고 타는 베트남 최고의 교통수단 쎄옴을 타고 하노이 시내를 가로질러 달리는 기분은 신난다는 말로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내내 즐거워하는 나에게 안(ANH)은 아예 베트남에 와서 살란다. 그 말을 들어서였는지 주위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와 사람들 속에 함께 섞여 웃음을 담은 손짓으로 여유있게 인사도 나누고 도시 외곽의 도로 주변에 나와 옥수수를 팔고 있는 아낙네들에게 길도 물으며 나는 어느새 베트남에 대해 정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도 티 탐(DO THI THAM)씨가 어린 딸과 친정어머니께 전해 달라며 부탁한 선물을 들고 하노이 시내를 빠져나와 2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탐의 친정집. 베트남 특유의 전면은 좁고 뒤편으로 길게 지어진 단층집에는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주변 친척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탐과 사위가 한국에서 잘지내고 있고 어머니와 딸을 무척 보고 싶어 한다는 말과 함께 보내온 선물을 전하자 친정 어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손녀(탐의 딸)의 얼굴을 쓰다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머나 먼 남의 나라에 자식을 보낸 어머니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어린 딸은 자식을 떼어 놓고 멀리서 애태우는 엄마(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가 보내 온 새 옷을 입고 온 방안을 뛰어다니며 마냥 즐거워만 한다.

 

탐의 친정집은 숙박업과 음식점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작은 방을 월세로 임대하기도 하고 숙소 이용자들에게 음식을 팔기도 한단다. 탐의 동생을 따라 집안 이곳 저곳을 돌아보았는데 대부분의 방이 비어있는 상태였고 식당도 한동안 영업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동생에게 이유를 물으니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한 일 년쯤 전에부터 사실상 문을 닫고 있다고 했다. 안(ANH)과 탕(THANG)의 말로는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면서 농촌 지역에는 노인과 아이들만 남아 있다고 했다. 특히 도시 인근의 지역이 더욱 심하다고 한다. 하노이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탐의 친정집은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쇠퇴해가는 대표적인 지역이라고 했다. 베트남이 자본주의 경제를 수용하면서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서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수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고 있지만 막상 도시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단다. 하노이 시내를 오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단다. 세상이 너무도 빨리 바뀌고 있어 결국 능력있는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며 탕과 안은 말꼬리를 흐렸다. 심각한 얘기는 그만 하잔다.

 

베트남 특유의 후한 식사대접을 받고 난 후 탐의 어머니께서 타국에 있는 딸을 위해 준비한 보약을 안전하게 전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다시 하노이로 향했다. 도로 양편으로 시원하게 트인 베트남 농촌의 정경을 감상하며 달리는 느낌이 마치 고향 동네의 넓은 들판길을 달리고 있는 것같이 평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난데 없는 빗줄기가 장대처럼 쏟아졌다. 탕과 안은 부랴부랴 비옷을 꺼내 입고 나는 안(ANH)의 비옷을 뒤에서 대충 뒤집어 쓴채 빗속을 뚫고 오토바이를 달렸다. 빗줄기가 어찌나 거세던지 비옷은 있으나 마나 온몸이 흠뻑 젖었다. '그래 이것도 베트남을 제대로 경험하는 것 중의 하나야' 라고 위안하며 조금이라도 덜 맞아보려고 기를 쓰고 있자니 오토바이 뒷자리에 바싹 붙어 앉아 비옷을 뒤집어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되면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노이에 도착하자 탕과 안은 하노이에서 가장 유명한 개고기 집을 가자고 했다. 베트남에 왔으면 반드시 개고기를 먹어보아야 한다며 하노이 외곽의 한 호수 근처에 있는 개고기집으로 안내했다. 원래 개고기를 즐기지 않는다며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권유와 두 사람의 호의에 못이겨 베트남 전통 술에 곁들인 개고기를 먹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갔다. 자신의 신상에 대한 것에서부터 일자리가 없어 외국으로 나가는 베트남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완벽한 의사소통은 아니었지만 참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술자리에서 였지만 그들이 가진 베트남에 대한 자부심과 희망도 알 수 있었고 한국에 대한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그들에게 있어 한국이 우호적인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우리의 술자리는 하노이 시내로 자리를 옮겨서 계속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함께 온 일행을 불러내고 탕과 안도 친구를 불러 즐거움을 더했다.

 

술자리를 마치고 난 후에도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오토바이를 나누어 타고 하노이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안(ANH)과 탕(THANG)은 나더러 쎄옴도 한번 제대로 타 보았고 개고기도 먹어 보았으니 이제 베트남에 살아도 된다며 하루 동안의 정을 표현했다. 함께 온 일행도 베트남에 적응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며 그들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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