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베트남

행복의 조건

이젠씨21 2014. 6. 5. 17:14

2004년 7월 25일

 

지난 밤 마신 술기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아 늦잠을 잘 만도 한데 어쩐 일인지 그리 피곤한 느낌도 없이 눈이 떠졌다. 공식적인 베트남 여행일정의 마지막 날. 일행 중 두 명이 일정을 연장하여 호치민으로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오전에 모두가 모여 그간의 느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 자유 일정으로 보낸 하루의 느낌이 특별했는지, 다들 어제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며 즐거워했다. 한 방에 둘러 앉아 각자가 느꼈던 베트남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풀어 놓았다. 평소 수많은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고 함께 고민하면서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생각해왔던 사람들이었기에 줄줄이 이어지는 각자의 느낌이 사뭇 진지했다. 이런저런 느낌을 함께 나누고 난 후 호치민으로 떠나는 두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배웅하고 다시 각자의 자유 일정에 들어갔다. 오늘 내 여정에는 일행 중 두 사람이 함께 하기로 했다. 어제 만났던 탕(THANG)과 안(ANH)이 오늘도 안내를 해주기로 약속한 터라 어쩌면 다시 쎄옴(XE OM)을 타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호텔 앞에 왠 승용차가 한대 들어왔다. 탕(THANG)이 휴무일을 이용하여 승용차를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다시 한번 탕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하노이 외곽의 농촌에 있는 투안(THUAN)의 집으로 향했다.

 

 

하노이 시내를 벗어나자 곧 바로 전형적인 베트남 농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둑을 따라 달리는 차창 밖으로 화창한 열대의 하늘아래 끝없이 펼쳐진 청녹색의 평야와 군데군데 자리잡은 작은 마을들. 언젠가 보았던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끝없이 넓은 녹색의 논길을 따라 눈부시게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소녀들의 자전거 행렬... 잠시 꿈같은 상상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우리 앞에 엄청난 물줄기가 나타났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도로가 끊겨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길을 돌아 가는데 탕이 자신의 집이 가까우니 들렸다가 가자고 했다. 10여분 후 도착한 탕의 집.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무원이 최고 선망의 직업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그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윤택해 보였다. 주변의 다른 집들에 비해 눈에 띄게 큰 집도 그랬지만 집안에 갖추어진 가전제품도 대부분 고가의 외국 브랜드였고 내부 인테리어도 어제 방문했던 탐의 친정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공무원에 대한 신뢰가 적었던 탓인지 탕의 가족으로부터 차대접을 받으면서도 일행의 얼굴에는 어딘지 의심이 간다는 눈빛이 역력했지만 더 이상의 상상은 하지않기로 하고 서둘러 투안의 집으로 향했다.

 

투안(THUAN)의 집에 도착하니 입구에서부터 가족들이 반기고 나섰다. 투안의 가족만이 아니라 투이(THUY)의 친정 부모님과 인근에 사는 친척까지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부의 상징이라는 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집. 8년이 넘는 시간동안 투안(THUAN)이 가끔씩 꺼내 보았을 사진 속의 그 고향집에서 많은 가족들의 환영을 받고 있자니 왠지 투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자리에 투안이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가족들 앞에 내가 아닌 투안이 있어야 하는데..

 

 

집안에 들어서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투안의 아버지께서 권하는 차를 마시며 한국에서 보내 온 선물들을 가족들에게 전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보내는 장난감 세트에서부터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내는 구두와 슬리퍼까지 엉성한 포장이었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뿍 배어 있는 물건들을 전하면서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선물을 받아드는 가족들의 얼굴에서도 즐거움이 느껴졌다. 우리 일행이 좀 늦게 도착한 탓에 먼저 식사를 했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차려내온 점심식사는 호텔 뷔페처럼 다양하고 푸짐했다. 함께 온 우리 일행들은 끊임없이 음식과 술을 권하는 베트남 사람들 특유한 식사문화에 적응이 잘 안되어 난감해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먹고 마시더니 금새 취기로 달아 올라 얼굴이 벌게 진데다 포만감까지 겹쳐 식식대기까지 했다. 그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오랜만에 본 투이(THUY)는 아줌마가 다 되어 있었다. 산달이 다되었던 지난 4월 말에 베트남으로 아이를 낳으러 온 투이. 한국에서는 새침떼기 멋장이 아가씨였는데.. 장난스럽게 아줌마가 다 됐다고 놀리는데도 시댁 식구들이 있어서인지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투이는 합법체류상태로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갈 수가 있다. 일하던 공장 사업주의 배려로 베트남에서 아이를 낳고 다시 돌아가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투이를 보고 아이를 잘 키우려면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빨리 돈벌어서 집도 짓고 땅도 사야 한단다. 남편 혼자 벌려면 너무 오래 걸린단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벌면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녀는 '한국 사람.. 잘 살아서 베트남 얼마나 힘든지 몰라!' 라고 하며 모르는 소리 그만하라는 투다.

 

투안의 집을 나와 하노이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차창에 기대고 스쳐지나가는 베트남 농촌의 정경을 보면서 나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한국에 온지 8년이 지난 이주노동자 투안. 그는 항상 넉넉한 가슴으로 주변의 베트남인들이 먼 타국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아픔을 감싸 안아주는 큰형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1년 전 같은 이주노동자인 베트남 여성 투이(THUY)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한참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선택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고 사랑의 결실이자 새로운 행복의 시작이어야 할 새 생명의 잉태가 이들 두 사람에게는 버거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둘이서 열심히 벌어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그 나름의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던 두 사람에게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쉽기 않은 모험이었을 게다. 결국 투안과 투이는 아이를 부모님에게 맡기고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벌어 돌아갈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가족이 생이별해야 하는 아픔까지 감수할 만큼 돈이 주는 반대급부가 매력적인 것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 다른 게 있는 걸까?

 

베트남에 오기 전 투안의 기숙사에 갔을 때 갓난 아들의 사진을 보면서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입가에 쓴 웃음을 짓던 투안의 얼굴이 떠오른다. 핏덩이 어린 자식을 베트남으로 떼어 보내 놓고 어린 딸에게 전해 달라며 한 밤중에 옷가지를 싸들고 찾아 왔던 도 티 탐의 눈가에 비쳤던 눈물이 떠오른다. '아빠 빨리 와!' 라며 울먹이는 자식을 떼어놓고 떠나와 외롭고 고된 타국생활을 견디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는데 수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자식의 입에서 보고 싶다는 말보다 '아빠 돈 빨리 보내!' 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서 가족 간의 사랑과 애틋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돈을 버는 기계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한숨 쉬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느꼈던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되살아난다.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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